5·18 민주화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꼭 알아야 할 역사
1980년 5월, 광주는 뜨거운 저항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단순한 폭동이나 지역적 분노가 아닌,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처절한 외침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군부의 권력 찬탈에 맞서 시민들이 스스로 일어나 정의와 인권을 지키고자 싸운 역사적 사건입니다.
* 배경: 유신의 그림자와 계엄령의 확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되면서 유신정권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후 정치 혼란이 이어졌고, 국민은 민주화를 향한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을 뒤집고 권력을 장악하려던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였습니다.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실질적인 군권을 장악했고, 1980년 5월에는 '비상계엄 확대'를 명분으로 국회를 해산시키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등 민주주의를 철저히 억압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에 반발한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면서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고, 특히 광주에서는 그 분노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 전개: 시민을 향한 총칼, 그리고 자발적 항쟁
5월 18일, 전남대학교 앞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자 계엄군은 곤봉과 군화발, 그리고 총기로 무자비하게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그런 폭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연대하며 맞서기 시작했습니다.
폭력적인 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로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계엄군과 대치하며 ‘시민군’을 조직하게 됩니다.
이들은 약 일주일 동안 광주를 자치하며 식량을 나누고 치안을 유지하는 등 질서 있는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충정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진압작전을 개시했고, 많은 시민군과 시민들이 희생되며 광주의 저항은 막을 내렸습니다.
* 왜곡된 진실, 그리고 진상규명의 노력
군사정권은 5·18을 ‘폭도들의 난동’이라 규정하며 진실을 철저히 은폐하고 왜곡했습니다.
수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지만, 사망자 수조차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고, 피해자들은 오랫동안 침묵을 강요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5·18의 진실을 알리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습니다.
이후 관련법이 제정되고 5·18 관련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광주에는 국립 5·18 민주묘지가 조성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유네스코가 5·18 관련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광주의 항쟁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귀중한 유산임을 인정받았다는 의미입니다.
*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5·18 민주화운동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입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희생과 피로 지켜낸 것입니다.
매년 5월이 되면, 우리는 광주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곡되거나 폄훼되는 역사 앞에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바로 세우는 데 함께 해야 합니다.
그것이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자, 앞으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이기 때문입니다.